그 바카라 룰와는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최종면접장에서 다시 만났다.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은 서로 어색했다.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반(학부제여서 반이 있었다)이었던 우리 둘은 누가 친하냐고 물어보면 친하다고 말하기엔 다소 어색한 사이였다.만나면 반갑게 인사했지만 단둘이 뭔가를 할 만큼 절친하지는 않았다. (물론 대학생 때의 나는지나치게 내성적이었기에 딱히 친한 친구가 별로 없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조용조용하고 차분해 보이는 그 바카라 룰와 더 친해지고 싶었기도 했지만, 어쨌든 졸업 즈음이 되어서는 안부조차 묻기 어려운 사이가 되었었다. 나는 학기 중간중간 휴학을 해 24살의 겨울 취준생 대열에 합류한 상태였고, 그래서 그 바카라 룰도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지조차 알고 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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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을 앞두고 긴장으로 굳어 있었지만 짧은 인사를 나눴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로 아는 체는 했던 것 같다. 인생에서 제일 쫄아있는 시기에 우연히 만났던 우리는 최종 합격자 오리엔테이션에서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회사에 들어갔고, 그 바카라 룰는 더더 좋은 사기업에 들어갔다더라고 한참 후에 건너 건너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흔히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대학 같은 학부 출신이니 비슷한 회사의 면접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 정도는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이후로 나는 공공기관의 삶에 익숙해져가며(찌들어가며) 하루하루를 그냥저냥 살고 있었다. 그러다 또 아주 우연히, 그 바카라 룰의 근황을 건너 건너 듣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예술학교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당시의 나는 마치 숙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모범생처럼, 대학교를 졸업했으면 회사에 들어가야 하고 회사에 들어갔으면 성실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내 주변 친구, 지인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 바카라 룰는 이름만 대면 전 국민이 다 아는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다시 학교로(그것도 예술학교로) 갔다니. '심지어 모 매거진에서 평론 글로 상도 받았다더라.' 그 소식까지 듣고 포털사이트에 그 바카라 룰의 이름과 매거진 이름을 같이 검색하니 오랜만에 보는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이 검색 결과에 등장했다.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은 정말 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뭔가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당시에는 내가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의 인생 경로 변경에 왜 그리 놀라고 동요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그 감정이 열등감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대체 왜, 나는 그 바카라 룰에게 이렇게 강렬한 열등감을 느낀 거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그 후로 나는 내가 현실에 찌들어가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주기적으로 그 바카라 룰를 떠올렸다. 아마 그 바카라 룰는 내가 주기적으로 자기를 떠올릴지 상상도 못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야근을 하다가 '걔는 지금 학교 한창 다니고 있으려나? 이제 자기 이름으로 작품 하나쯤 만들었으려나' 생각할 때도 있었고, 행사에서 손님 안내를 하다가 '걔는 지금쯤 졸업했을까? 자기 선택에 후회는 없었을까?'라는 엄청나게 진지한 상념에 빠질 때도 있었다.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야, 내가 왜 그렇게 그 바카라 룰에게 강한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조금쯤은 알게 되었다. 잠시나마 나와 같은 선상에 서 있었는데(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회사의 면접 대기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리고 비슷하게 보수적인 '회사'에 입사했는데), 용기를 내서 안정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글을 쓰는 것을 업(業)으로 삼기 위한 공부를 다시 시작한 그 바카라 룰가 부러웠던 것이다. 회사에 다니며 일상에 파묻혀 글을 쓰는 것이 내 꿈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글을 써서 상을 받고 진로 변경까지 시도한그 바카라 룰가 그토록 부럽고 부러웠던 것이리라.
지금 그 바카라 룰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는 알지 못한다. 대학 친구들과도 연락이 대부분 끊겨 건너 건너 주워듣던 소식마저 이제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저 먼발치에서 (소식도 모를 정도로 먼 곳에서ㅎ) 그 바카라 룰가 원하던 것을 이루고 멋진 작품을 만들어냈기를 기도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나는 그 바카라 룰에 대한 열등감의 원인을 찾다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에 대한 깨달음도 얻고 글을 쓸 수 있는 동기도 부여받았으니, 언젠가 10여 년 전 면접장에서 만났던 것처럼 또 우연히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이제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어색해진 친구 ㅇㅇ야, 덕분에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했다는 오랜 바람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