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절망과 어떤 빛의 바카라 오토프로그램
션 베이커의 '바카라 오토프로그램' 리뷰
그럭저럭 무탈한, 무난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욕심이 되는 시간이 있다. 누구도 길을 알려주지 않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던 막연한 어둠의 시간을 혼자 겪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좋은 날도 오리란 기대조차 사치 같은 그 시간은 참 쓸쓸해서 쌀쌀하다. 내가 걸어온 길이 터널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끝을 알 수 없는 동굴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어쩌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는 것 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내 처지는 마지막까지 왕자가 나타나지 않는 재투성이 신데렐라 같다.
신데렐라는 없다
뉴욕의 스트리퍼 바카라 오토프로그램(미키 매디슨)는 어느 날 자신의 바를 찾은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마크 아이델슈테인)를 만나 일주일간의 계약 연애를 하다가 충동적으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반의 부모는 미국에 있는 그의 하수인들에게 혼인무효소송을 진행할 것을 지시한다. 하수인의 등장에 겁을 먹은 이반은 바카라 오토프로그램를 버린 채 혼자 도망쳐 버리고, 전용기로 이반의 부모가 미국으로 입국하면서 이 결혼 소동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7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카라 오토프로그램’는 처음에는 1990년 줄리아 로버츠가 주인공을 맡은 ‘프리티 우먼’의 21세기 버전처럼 보인다. 스트리퍼와 재벌 2세의 사랑이라는 낭만적 관조로 로맨틱 코미디의 빛을 살짝 머금고 시작한다. 하지만 하수인이 등장해서 몸싸움을 벌이는 25분 동안의 격정적인 슬랩스틱 장면을 지나면서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표정을 바꾼다.
션 베이커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8)나 ‘레드 로켓’(2022) 등 인생의 가장 하층부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쓱 들어가서 그들의 삶을 동정하지 않는 공정한 시선으로 바카라 오토프로그램를 풀어갔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모텔에 방치된 아이들, 인종차별을 겪는 흑인 트랜스젠더, 포르노 배우,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들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계급사회를 바카라 오토프로그램하지만 신파적 클리셰로 관객의 감정을 착취하지 않는다.
이전 작품에서 빛과 색감으로 회화 같은 미장센을 보여주었던 션 베이커는 ‘바카라 오토프로그램’를 35mm 필름으로 촬영해 필름 영화의 살짝 거칠고 빛이 날아간 듯한 색감을 만들어 낸다. 그런 1970년대 영화의 느낌 속에 21세기의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카메라가 극에 개입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촬영하기 때문에 어떤 씬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비교적 대중적이고 요란스러운 소동극인 ‘바카라 오토프로그램’ 역시 주인공을 비난하지도 격려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 객관적 시선으로 소동과 소동 사이에 진짜 삶과 냉정한 현실을 배치한다. 인생 역전을 꿈꾸는 신데렐라 러브 스토리에서 돈으로 둘을 갈라놓으려는 막장 드라마로 변화하는 이야기 속에서도 션 베이커는 성노동자의 삶이 단순히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눈 돌리고 있을 뿐 엄연히 있는 이야기라고 말하며 리얼리티를 끝까지 지켜낸다.
그럼에도,삶이라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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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 오토프로그램는 뭔가를 넉넉하게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니 돈과 마약과 섹스, 그 모든 것들이 주는 달콤함은 그녀의 현실 감각을 흐리게 만든다. 그래서 돈을 줄 테니 일주일만 만나자는 이반의 제안도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충동적인 결혼식도 모두 받아들인다. 청혼을 하면서 이반은 바카라 오토프로그램와 함께라면 돈 한 푼 없이도 그저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결국 돈 한 푼 없이는 이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다. 평등을 말하지만 여전히 계급은 존재하고, 계급을 나누는 보이지 않는 선은 견고하게 서로를 섞이지 못하게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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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질 게 없을 것 같은 희망이 없는 삶은 겨울 같지만, 바꿔 생각하면 겨울은 조금만 체온을 나누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섣부른 위안은 도움이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흔하게 마음먹을 수 있는 희망도 꽤 멀리 있지만, 가끔은 생각 없이 누군가에게 안길 수 있다면, 속절없지만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흐린 눈으로 성냥 하나 켜서 빛을 낼 수 있다면 이렇게라도 좀 더 살아도 좋다, 싶다.
[바카라 오토프로그램음악 정보] Spotify /Matthew Hearon-Smith
‘바카라 오토프로그램’의 음악은 그와 이전 작품을 함께 했던 매튜 히어론 스미스가 오리지널 스코어의 작곡자로 참여했다. 블론디의 1979년 싱글 'Dreaming'과 t.A.T.u.의 2002년 대히트곡 'All The Things She Said', Take That의 2008년 영국 1위곡인 'Greatest Day' 등 세계적인 히트곡이 포함되어 복고적인 영화의 색감과 어우러진다. 스트리퍼인 주인공이 춤을 출 때 카디 비, 메건 더 스탤리언, 슬레이터 등 대중적이고 익숙한 노래들을 만날 수 있다.
글최재훈
바카라 오토프로그램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바카라 오토프로그램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바카라 오토프로그램·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