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마법을 부렸을 리도 없을뿐더러 내겐 그저 북에 있는 둘째 아들의 생사를 궁금해하며 남북한이 뭐라도 같이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어찌 보면 불쌍하고 자존심이 강한 노인일 뿐이지만 이런 이야기들로 바카라 레전드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어린 바카라 레전드. 엄마는 떠나버렸고 저 무시무시한 검은 마왕에게 들키는 날엔 나에게도 소리를 지르며 다가와 위협할 거라는 두려움. 숨도 쉬지 말고 이불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09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았다. '바카라 레전드야. 아빠가 엄마에게 못된 사람이긴 했지만 그렇게 무시무시한 괴물은 아니야... 아빠가 너를 예뻐하고 저 큰 현미경도 보여주고 그랬잖아... 기억 안 나?'
공포에 질린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어떤 이야기도 바카라 레전드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 마치 심장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처럼 뛰고 있고, 근육은 굳어질 때로 굳어져 바카라 레전드서 나무토막처럼 얼어가고 있다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신체의 반응들이다.
'나는 죽은 사람이다. 절대 들키면 안 돼.'
그 밤에 쩌렁쩌렁 울리던 아빠의 고함소리가 어린 바카라 레전드 심장에 꽂힌 것 같았다.
젠장, 추상같은 눈빛의 다 큰 어른이었던 바카라 레전드에게 저주를 받았던 게 차라리 나았다.
죄책감은 일상을 차분하게 하고 나를 반성하며 근면성실하게 하는 이점이 있었달까.
어린 바카라 레전드 공포는 나의 순간순간에 식은땀을 흘리게 했다.
물론 이런 공포를 아기를 사산하고 입양하는 과정에서 처음 느낀 것은 아니다.
심리상담이 진행되면서 상담자와 함께 나는 내 생애 전반에서 느꼈던 극한 두려움들을 모두 골라 세워놓아 보았는데 5살짜리 어린 바카라 레전드 공포로부터 시작해,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숨을 제대로 못 쉬어 열외가 되던 일들, 중학교 시절 게슈타포(그의 별명이었다) 담임과의 첫 면담 이후에 교실에서 일어났던 과호흡. 이후로부터 지속된 심장부정맥. 그 당시 아기가 열경기를 할 때 내가 느꼈던 패닉들을 모두 줄줄이 연결하다 보니 이 모든 공포의 느낌은 마리가 그 당시 느꼈던 공포와 그 결이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장 박동수가 130을 넘어가고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다 쓰러지게 되는...
바카라 레전드 공포는 평상시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덮친다고 느낄 때마다 나를 휘감는 마법처럼 나타나 존재를 부정하는 주문을 외우며 나를 쓰러뜨리고 사라지곤 했다.
'나는 죽은 사람이다. 차라리 이렇게 사라지면 좋겠다.'
도대체 이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바카라 레전드 공포를 어찌해야 할까.
처음엔 그 공포감을 쳐다보는 것 자체가 숨 막혔다.
08
처음엔 도망치지 말고 곁에 있어주자가 최선이었다.
이불속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바카라 레전드 곁에 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고... 짠한 양반... 엄마에게 무시당할까 봐 저렇게 허세를 부리다니...
이미 돌아가신 후여서일까
바카라 레전드 무시무시하다는 검은 마왕.
내게는 그저 자신의 초라한 늙음을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안쓰러움으로만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