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문집을 준비한다며 시를 한 편씩 써서 내라는 숙제를 받았다. 그중에서 가장 잘 쓴 시 몇 편을 뽑아 문집에 싣는다고 했다. 나도 물론 시를 한 편 써서 제출했는데 며칠이 지난 후 사설 바카라이 나를 불렀다.
“네가 쓴 시 말이야.”
사설 바카라이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순간 나는 사설 바카라이 내가 쓴 시가 문집 실리게 되었다고 말해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혹시, 너 이 시 어디서 베낀 건 아니니?”
의외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그런 건 아니었기에 사설 바카라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사설 바카라 대답했다.
10
사설 바카라이 나의 눈을 엄숙하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사설 바카라의 눈빛은 나를 깊이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내가 쓴 시를 의심하고 있는 눈빛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네가 쓴 거 아니잖아. 그렇게 단정 짓는 눈빛.
하지만 그 시는 며칠 전 집에서 담담히 숙제하듯 써내려 간 시였는데. 뽑힐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으며 그러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적어 내려간.
"아뇨."
사설 바카라은 어느새 실망한 눈초리였다. 내가 베낀 거라고 말하기를 기대했던 걸까. 사설 바카라을 실망시키는 건가 싶어 아주 잠깐, 그렇다고 대답했었어야 했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닌 걸. 나는 순식간에 광활한 얼음 바닥 위에 홀로 세워진 것 같았다.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어둡고 차가운 바닥 위. 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지는 동안 사설 바카라은 나를 보며 전혀 웃지 않았다. 나는 사설 바카라이 내 시에 대해 뭔가를 더 말해주기를 은근히 기다렸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여러 가지 생각을 머금고 나는 길을 걸었다. 사설 바카라은 왜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걸까. 내가 못 미더운 걸까 아니면 내 시를 믿지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누군가의 것을 베꼈다는 의심을 거두지 못할 만큼 내 시가 정말 좋아서 그런 걸까 하는 의문까지 생각이 닿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좋은 시라면, 문집에도 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이 내게 찾아들더니 자리를 잡고 떠나지 않았다. 사설 바카라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여전히 걸리긴 했지만 사설 바카라도 나름의 확인은 하긴 해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이해해 보기로 하고 솟아난 기대감을 떨쳐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학교 문집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학교 문집에 사설 바카라 쓴 시는 실리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지나 20대 초반 무렵 초등학교 6학년 때 사설 바카라을 친구들과 만난 적이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가볍게 매주 한잔씩을 했고 사설 바카라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서로의 얘기들이 오고 가다 드문드문 개별적인 대화가 이뤄질 무렵 사설 바카라 옆에 앉아 있던 나는, 오래전 그 시에 관한 말을 사설 바카라에게 꺼냈다. 그리 심각하지 않은 투로, 오래전 그런 일이 있었던 걸 사설 바카라에게 상기시키며. 하지만 사설 바카라은 전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대신 사설 바카라은 눈가에 눈물을 비치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 줄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사설 바카라으로부터 뜻밖의 사과를 받았다. 나는 어느새 초등학교 6학년 그 교실, 그때의 순간으로 되돌아가 사설 바카라 앞에 서 있었다. 사설 바카라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고 나를 어루만지며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주 오래전 그 일이 스스로는 알지 못했던 글쓰기에 대한 미약한 재능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반대로, 나의 글을 믿지 못하는 어느 시선과 맞닥뜨리게 된 최초의 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때 사설 바카라이 나를, 나의 글을 믿어주었더라면, 나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내 글이 다른 타인에게 어떻게 여겨질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지만 부질없는 가정임을 안다.
가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사설 바카라을 떠올린다. 이제는 사설 바카라이 나를 향해 안경 너머 웃음을 지어주던 모습이라던가 내가 쓴 일기를 반 아이들 앞에서 읽어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나를, 내가 쓰는 글을 알아봐 주었던 건, 그 사설 바카라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이후로도 수 차례 만남을 갖던 사설 바카라과 그리고 친구들과도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멀어져 갔다. 사설 바카라이 얼핏 학교를 그만두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언젠가부터는 사설 바카라의 소식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사이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사설 바카라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사설 바카라이 나의 글을 본다면, 사설 바카라은 내게 어떻게 얘기를 건네어 주실까.
글은 쓰는 이에 의해 자유롭게 쓰이지만 타자의 시선 속에 놓이는 산물이다. 샤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을 나를 객체로 고정시키는, 즉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로 여기려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런 시선을 부정하고 극복해 나가기 위한 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은 타자를 거울삼아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고 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는 타자의 시선 속에 놓이는 나의 글조차 어떤 이미지로 고정될 수 있음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시절 사설 바카라이 내가 쓴 시를 향해 품었던 생각마저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글이라는 속성 자체가 전적으로 타인이 읽어주는 행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니까.
그런데 글은 어떻게 쓰이는 걸까. 떠오른 어떤 생각이 글로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충동적으로 혹은 이성적인 욕망이 발화되어 쓰이기도 한다. 제임스 조이스가 말한 에피퍼니가 마치 현현하는 것처럼 눈앞에 떠올라 써내려가는 것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글쓰기의 행위 자체는 어떤 형식이나 기준, 누군가의 시선에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것이다. 그만큼 글쓰기에는 수많은 개별적 동기가 있지만 그렇게 태어난 글은 결국 타인의 시선 속에 놓이게 된다. 때로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인정투쟁을 하는 인간의 존재처럼, 글도 그 운명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때로 글쓰기는 그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가 쓴 그 시는 사설 바카라의 시선과 의심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지금껏 써가는 글도 때론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애를 쓰거나 혹은 나의 존재와 사유를 고정시키는 것에 반해 노력해 가는 과정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의 글쓰기는 자유지만 그렇게 쓰인 글은 타인 밖에 마치 혼자인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투쟁과 그 반대의 인정의 욕구 속에서 나의 글쓰기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쓰는 글은 타인을 배척할 수 없고, 오히려 타인의 시선 속에 놓이며, 때로는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을 지금의 나는 어렴풋이 느낀다.
오히려 사설 바카라과의 그 경험이 지금 내게 환기하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타자의 의심 혹은 부정의 시선이 있더라도 그것을 피할 길이 없으며 그럼에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고 결국은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걸 멈추는 순간, 자신을 객체로 고정시키는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내적 충동으로부터 이끌어진 글쓰기의 자유를 억압하다 못해 포기한 스스로를 역설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사설 바카라 쓴 글에 대한 인식이 나의 의도와 같지 않거나 심지어 의심을 받는다고 해도, 쓰기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글쓰기라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글쓰기라는 작은 행위가 내 삶에 있어서는 가장 큰 자유가 깃든 일이라는 걸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