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쇼퍼홀릭〉 주인공 레베카의 고백이다. 황홀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이 슬픔으로 흐려질 때, 난 그 눈에서 텅 빈 내 마음을 봤다. 그렇게 옷을 많이 사고도 행복하지 않았다. 공주처럼 반겨준 백화점 직원들도, 철없는 아이라며 비난한 가족들도 내 마음엔 관심 없었다. 30대 후반, 박사 논문을 써서 남들이 선망하는 사회적 지위를 얻기로 결심했을 때 극심한 우울증을 만났다. 난 주저앉아 버렸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처음으로 알았다. 난 평생 남이 정한 기준에 바카라 라이브 끼워 맞추기 바빴고, 한 번도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일류대 간판과 사회적 지위, 멋진 옷으로 바카라 라이브 꾸미려고만 했었다는 것을. 학교를 오래 다니고도 내 기준을 갖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학교가 ‘이런 게 정답이야’를 주입하면 틀리지 않기 위해 침묵한 채 그 규칙을 받아들였다. 시행착오를 거쳐 나만의 답을 찾아가기보다 찍어주는 정답을 외워온 우리.
“1,2,3 중 뭘 사야 할까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글 속엔 틀리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는 우리의 관성이 있다. 학교 밖 바카라 라이브로 나온 나를 지배했던 강력한 규칙은 이것이었다.
‘비싼 물건을 가진 삶이 멋있는 삶이다.’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했지만, 옷을 좋아하는 내 존재는 존중받지 못했다. 그런 내게 학교 밖 규칙은 거의 종교가 되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며 쇼핑으로 결핍을 채우려 했고 난 쇼핑중독자가 되어갔다. 여행, 사진 촬영, 친구들 모임, 선물 교환, 결혼 준비...... 일상 속 선택의 순간마다 소비주의의 신은 거대한 미소를 지어 보냈다.
갖고 싶은 것들을 가져도 해결되지 않은 공허함이 있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단골 쇼핑몰 사장님 어깨에 서보았던 바카라 라이브. 그것만 있으면 내 삶이 멋져질 줄 알았다. 학교 다닐 때처럼 난 다시 누군가가 찍어준 정답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때까지의 삶이 그랬다. 모범생이 되기로 한 건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나의 생존 전략이었다. 일류대 출신의 좋은 직업을 가진 옷 잘 입는 예쁜 여자. 나는 한국 사회가 정해 준 정답에 맞는 여성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주저앉았을 때 옷장 속 바카라 라이브은 아무런 정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바카라 라이브은 비싼 솜사탕에 불과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방황하던 그때, 우연히 오드리 헵번의 사진과 마주쳤다. 자신을 숨기지 않는 그녀 앞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내가 알던 정답을 부인하기보다, 다른 바카라 라이브가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오랜 마법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나 자신으로 커밍아웃
“박사 포기하신 거 후회하지 않으세요?”
많은 길을 돌아 여기 온 내게 가끔 누군가가 묻는다. 더 일찍 나를 알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나를 탓하고 싶진 않다. 나를 몰라 거쳐야 했던 궤적까지도 내 바카라 라이브의 일부니까.
박사 논문을 포기한 건 후회하지 않는다. 일류대 이름을 뽐내며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좋은 직장의 드레스 코드를 맞추려 애쓰던 그때의 나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나는 나로 커밍아웃했기 때문이다. 커밍아웃. 그건 아무리 험난한 길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믿음이 전제된 선택이다.
이 책의 시작은 낮은 자존감과 정체성 혼란으로 고통받던 바카라 라이브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글을 쓰며 확실히 배웠다.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이 정한 규칙에서 벗어나 진짜 내가 되는 것에 있었다.
난 박사 가운을 벗고 나를 입기로 했다. 옷을 좋아하고 세상이 아름다워지기를 꿈꾸는 조용하고 삐딱한 시선의 여자, 조용한 말괄량이. 새로운 바카라 라이브서 만난 새로운 나 자신이다. 나를 만나자, 나처럼 정체성을 모른 채 획일화된 규칙에 고통받았을 누군가의 정체성 찾기와 정체성 입기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패션힐러가 되기로 했다.
일상을 지배하는 소비주의
“정체성을 찾으면, 비싸지 않은 옷을 돌려 입어도 옷 입기가 즐거워져요.”
내가 스타일링 강의에서 빼놓지 않는 메시지다. 모 백화점에서 강의를 하고 돌아온 다음 날 백화점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내 강의를 들은 백화점 VIP 고객의 항의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정체성 같은 건 모르겠고 비싼 옷을 많이 사 입는 나는 그럼 틀렸단 말이냐.’
아, 맞다! 그곳이 소비주의의 천국인 백화점임을 난 잊고 있었다. 이야기를 전했던 직원 또한 그곳이 백화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조용히 타일렀다. 그날 우리가 살고 있는 바카라 라이브를 지배하는 규칙의 실체를 다시 보았다.
여전히 바카라 라이브의 세계에 사는 분들에게 내 시각은 불편할지도 모른다. 몸에 걸친 가방과 신발로 서로의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은근슬쩍 가늠하고 그 속에서 승자가 되려는 욕망, 그러나 돌아서면 비싼 물건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는 이중성. 벗 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모순은 바카라 라이브의 세계가 우리 일상을 유유히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행복은 암묵적 약속에 순응하지 않는 것에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바카라 라이브은 좁은 의미에서는 바카라 라이브 그 자체를, 넓은 의미에서는 ‘이런 게 좋은 거야’라고 합의된 기준을 의미한다. 비싼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면 열등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소비주의, 패션 트렌드에 뒤처지면 패자 취급하는 담론, 외모와 패션, 연애와 결혼 앞에서 여성이 취해야 할 태도를 강요하는 편견, 학교 이름과 좋은 직장을 과시하는 허세.
우울증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온 내가 찾은 행복은 이런 암묵적 약속에 순응하지 않는 것에 있었다. 진짜 멋있는 삶은 바카라 라이브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건강 한 자존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진실한 소통. 진짜 멋있는 삶은 여기에 있다.
물론 바카라 라이브을 선망하는 당신과 바카라 라이브을 가진 채 미소 짓는 당신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 세계를 부인하기보다 다른 세계가 있음을, 다른 세계에서 다른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다.
누군가의 바카라 라이브 앞에서 작아지지 말기를.
친구들과의 모임 후 자신의 가방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지 말기를.
당신의 바카라 라이브서 결국 당신 자신을 만나기를. 가장 당신다운 모습으로 다른 차원의 기쁨을 누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