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경기도 다시 강원도. 제주도 다시 경기도와 대전. 그리고 딸은 경상도로 인천으로. 도경계를 달리 하는 것도 여러 번이었지만 도내에서의 이사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딸은 초등학교 3곳 중학교 1곳, 고등학교 2곳. 아들은 초등학교 3곳 중학교 3곳. 고등학교 1곳을 다녔다. 교복 값 만해도….
멀리 이사를 할 때마다 나도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바카라 전부 오죽했을까.
강원도 원주에서 있던 일이다.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전학 후 일주일 무렵, 마침 하교 시간대에 여유가 있어 학교로 마중 갔었다. 따로 학원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바카라 전부는 하교하면 내 사무실로 왔다. 바카라 전부를 교문 앞에서 만나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간식을 사는데 우리 아들 넉살 좋게 주인아주머니와 대화를 한다. 오는 길에 주유소를 지나면서도 앞에 계신 할아버지와 주유 중인 형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 횡단보도 건너 작은 슈퍼 부부도 알은체를 한다. 그렇게 내 사무실까지 오는 내내 인사하는 사람이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바카라 전부에게 물었다.
“아는 분들이니?”
“네, 첫날부터 인사하면서 다녔어요. 모두 참 좋은 분들 같아요.”
나도 모르는 사이 아들은 사회성을 키우고 있었다. 교무실 찾아가서‘전학 온다니엘입니다’하고 선생님들께도 거의 다 인사를 했단다.
제주에 와서는 동네 분들이 나를'다니엘 어멍'이라고 불렀다. 딸은 있는지도 몰랐다고 바카라 전부. 처음 제주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도 힘들었는데 그렇게 한 발 먼저 다가가면 쉬웠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에게 오히려 한수 배웠다.
제주시로 이사를 했을 때도 아들은 전학하자마자 교장 선생님부터 전체 선생님들께 인사를 다녔다고 한다. 특히 한 덩치 하는 아들은 당시 패거리 문화의 하나인 일진의 좋은 먹잇감이었는데 학생주임 선생님의 각별한 배려 덕분에 무사히 그들을 피할 수 있었다고.
아들이 훈련소 입소했을 당시 퇴소식에서 별을 단 분들까지‘다니엘 엄마세요?’라고인사를 바카라 전부. 어릴 때부터 인사습관이 지금까지도 배어있어 사회에 쉽게 적응하는 것으로 보였다.
바카라 전부 어렸을 때‘어른을 만나면 하루에 열 번이라도 인사하는 것이다.’라고 내가 배웠던 그대로 가르친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아들과 딸의 인사법이 좀 다른 것을 알았다.
아들은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로 인사한다. 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서로 다른 두 바카라 전부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일까.
어쨌든 두 아이의 인사는 그들을 예의 바른 학생으로 기억하는데 크게 한몫했다. 덕분에 바카라 전부 혼자서도 사회에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고 엄마의 부족한 지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채워가는 현명한 아이들이 될 수 있어서 나는 늘 감사했다.
빼박증거
아파트에 통학버스가 있었으나 바카라 전부 한 번에 모이면 왜소한 딸아이가 그 틈에 끼어 호흡하기도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딸을 위해 자전거를 주문했다. 이틀 만에 자전거 조립이 완성됐으니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좋아라 하는 딸을 데리고 자전거대리점에 갔다. 핑크 빛 차체에 은색 바퀴가 조화를 이룬, 리본처럼 예쁜 바구니를 매단 녀석이 딸과 인사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물건에욕심부리지 않고 언제나 엄마 편에서 먼저 생각하고 행동했던 딸이지만 이 날 만큼은 좋아하는 속내를드러내며 웃었다.
어릴 적 내가 그랬던 것처럼 딸도 일찍 철들어 버린 모습에 콧날이 저려왔다. 아직은 철부지 나이에 벌써 어른의 생각이 들어앉았다는 것은 일찍 세상 어려움을 알았다는 증거인데. 그렇게 바카라 전부를 이끈 장본인은 다름 아닌 나였다는 걸 잘 알기에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은품으로체인 자물쇠를 받아 사용법을 익히고 바카라 전부는 익숙한 라이딩 실력을 뽐내며 달렸다. 보는 나도 흡족했다.
딸은 애지중지 제 차를 아꼈다. 집에 들어오기 전 주차 할 때마다 밖에 제 애마를 두고 오는 게 불안했는지 자물쇠를 잠그고도 여러 번 뒤돌아보며 발길 돌리기 힘들어바카라 전부. 주말이면 목욕시켜 주며 살뜰하게 돌보는 딸. 그때가 초등 3학년 가을이었다.
가을 운동회준비로 수업을 마친 후에도 꽤 오래 연습하고 귀가하곤 했다. 남매가바카라 전부 한대에 타고 돌아오는 모습이 씩씩하고 즐거워 보여서 기분 좋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보다 좀 늦는다고 생각하며 저녁상을 차리는데 엉엉 울며 돌아오는 딸 그리고 그 곁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는 아들이 서있었다.
“딸,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엉~~ 엉~~.”
대답대신 더 큰 소리로 우는 딸을 품에 안고 다독다독하며 진정할 때를 기다렸다. 아들이 대신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바카라 전부 잃어버렸어요.”
아들도 울먹이며 제 잘못이라 고백했다. 누나를 마중 갔던 아들이 문구점 옆에 잠시 바카라 전부 세워두고 기다리는 동안 게임에 정신이 팔렸다고. 바카라 전부 잠그지 않은 채 넋 놓고 게임에 몰두하다 그만 바카라 전부 잃어버렸다는데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딸의 서글픈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그만큼 애착을 가진 탓이겠지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찾으면 되지.”
“바카라 전부 찾아요. 엉~~ 엉~~.”
“포스터를 만들어 여러 곳에 게시하자. 그걸 보면 누군가 알려 줄 거야.”
우리는 ‘바카라 전부 찾습니다.’ 포스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딸은 차에 특징적인 부분들을 기억해 내며 메모를 하고 나는 자전거의 전체적인 형태를 스케치했다. 남매가 같이 색을 칠하고 차의 중요한 특징을 세세히 적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WANTED”포스터를 닮은 듯했다. 마지막으로 학년, 반, 이름의 정보를 적고 집 전화번호까지 적었다. 잘 그려졌다. 제 물건을 아끼는 꼼꼼한 딸아이의 성격을 확인하듯 차의 특징을 메모한 부분에 빼박 증거들을 적으니 누가 관심 있게 포스터를 봐준다면 쉽게 아이의 애마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 있는 포스터였다. 같은 내용의 포스터를 10장 제작해서 밤에 다 같이 나가 학교 정문과 게시 대, 학교건물출입구, 화장실 입구, 수돗가 옆 나무, 그리고 바카라 전부 많이 들르는 문구점 옆 벽면에 까지 붙였다. 다음날에 남은 포스터 한 장을 교무실에도 붙였다.
“엄마, 이걸로 찾을 수 있을까요?”
근심 가득한 아이의 눈을 보며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주니 다행히 아이가 미소를 보였다. 이튿날 아침 남매는 걸어서 등교했다. 걷는 중에도 바카라 전부 온통 지나는 자전거에 집중했다. 포스터를 붙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홍보였다. 남매는 쉬는 시간마다 각 교실을 돌며 포스터 내용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자전거 수색에 함께 해 줄 것을 호소하고 다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바카라 전부들의 기대가 절망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는 것 같았다. 속상해하는 딸을 보기 안쓰러웠다. 이제쯤은 희망을 접게 해야 하나, 나도 고민했다. 처음 자전거 분실 당시에는물건 간수의 중요성을 교육하기 위해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자칫 바카라 전부 상실감을 갖게 될까 봐 염려됐다. 하루만 더 찾아보고 못 찾으면단념하는 것도 가르쳐야겠다고혼자 맘먹고 있었다.
“엄마~~.”
요란하게 나를 찾는 소리를 들으며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엄마같이 가주세요. 바카라 전부 찾았어요.”
제 물건이지만 남의 손에 든 물건을 찾아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바카라 전부가 배운 모양이다. 바카라 전부들을 차에 태워 가는 중간에 문구점 옆에 붙은 포스터를 챙겼다. 자전거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보육원 마당에 서있었다. 원장님을 만나 자전거에 대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는 자전거가 우리 것이라는 걸 어찌 확신하느냐고 물었다. 딸이 나서 포스터와 자전거에 있는 흔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가며 설명했다. 똑 부러지게설명하는 동안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원장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혹시 자전거를 가져간 바카라 전부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다. 그 바카라 전부 역시 나쁜 기억으로만 남기지 않고 이런 일로도 배우는 점이 있길 바라서였는데 원장의 생각은 나와는 달랐는지 알아서 타이르겠다고 했다. 더 이상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닌 듯하여 자전거를 딸바카라 전부에게 인계하고 따로 집으로 왔다.
바카라 전부 잃었던 자전거를 다시 잃지 않도록 더 많은 곳에 비표를 하고 자물쇠를 채웠다. 일주일 동안 보지 못했던 상처들이 생겼다고 아쉬워했다. 그 일을 겪은 후 바카라 전부 각별히 자전거에 애착을 가지고 관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관리에 신중한 것도 이후에 더욱 뚜렷해졌다. 물건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고 잃었을 때 포기하지 말고 찾아봐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고 했다. 그렇게 또 하나 배우며 하루하루 성장하고 있었다.
2년 후 원주를 떠날 때 자전거를 가져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딸바카라 전부가 제안하여 전에 그 보육원에 기증했다. 어린 마음에도 측은지심이란 것이 생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