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전에서부터 화가 올라오지만 심호흡하고 경고로 마무리했다. 다년간의 다툼 끝에 사사로운 것까지 싸잡아서 혼냈다가는 제명에 못 살 것 같아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좀 봐준다. 그러면 좀 작작 해야지. 우리 집 장남은 사람 인내심 한계 실험을 기똥차게 해댄다. 이래도? 요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화 안 내? 이렇게 놀리듯 틈만 나면 딴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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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보라;야아 아아아아아 아! 너 지금 모 하는 거야? 아까도 그러더니? 지금까지 게임했어?바카라보라;
눈을 아주 심각하게 크게 뜨며 최대한 자신은 아무 죄가 없고 억울하다는 톤으로 대답한다.
바카라보라;아냐. 엄마 아냐. 이거 스스로 게임 돌아가게 무한 모드 작동해 놓은 거야. 난 안 했어. 그냥 켜둔 거야.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똥 싸는 소리 하지 마. 누가 공부하며 게임 켜놓으래? 너 진짜 제정신이야?바카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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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보라;아아아아악!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야. 같이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까지 한 거 엄마 때문에 다 날아갔잖아. 엉엉.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야. 무한모드라며? 온갖 정신이 여기에 쏠려있는데 이게 공부가 되냐? 너 지금 잘못해 놓고도 이딴 식이야?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엄마 나 게임 안 했다니까.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아... 얘가 막 나가네. 지금 너 내가 게임 껐다고 분개했잖아. 켜놓고 게임 계속 돌리고 공부가 되냐고?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흐흐 흐흑... 엄마 나빠. 엄마 그러면 책만 책상에 펴놓고 있으면 공부하는 거야? 아니잖아. 나 숙제하고 있었고 게임만 자동으로 플레이시켜 놓은 거야.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가슴에 손 얹고 다시 생각해 봐. 공부할 때 누가 게임을 무한모드로 재생해 놔. 이건 아냐.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나도 그럼 책만 펴놓고 공부했다고 할 거야. 엉엉바카라보라;
이미 맛이 갔다. 우기기 모드 돌입 해버렸다. 아비 호출해야지. 난 안 되겠다. 내 말도 안 듣고 이제 게임에 미쳐서 무한모드 모시깽이 거리며 바카라보라를 무시해 댄다. 한 때 스타크래프트 배틀넷에서 세계인들과 게임을 즐기던 바카라보라를 게임 무식자처럼 취급하는 네가 참 가소롭지만 그건 라테이야기므로 하지 않았다. 바카라보라도 게임 좋아했잖아. 어쩌고 저쩌고 꼬리잡기 하면 곤란해진다.
바카라보라;여보 왜 안 와? 빨리 와.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응.. 응응. 지금 가려고 했어.바카라보라;
집 앞에서 한가롭게 동료들과 10시 넘어서까지 양갈비에 회식을 어제에 이어서 연일로 즐기시는 남편에게 콜 했다. 거나하게 취해서 혀 꼬부라진 소리 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목소리가 이상하다. 뭐지? 잠시 궁금했지만 살아있는 것은 확인했으니 다시 전화 안 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띠 띠띠 띠 띠띠 띠로록. 문이 열렸습니다.'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니다. 남편의 까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집에 들어왔다.
바카라보라;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창백해!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나 이상하게 배가 아프네. 으윽바카라보라;
양갈비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9시쯤부터 배가 살살 아파왔다고 한다. 술을 작작 먹어야지.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고 자기가 청춘이냐며 술 때문에 그런 거 아니냐고 했더니 한사코 그건 아니란다. 소화가 안된다고 해서 집안 다 샅샅이 뒤져서 소화제 종류별로 먹이고 등 두들겨 주고 손바닥 지압해주고 나니까 아이와 했던 실랑이는 잊혔다. 계속 화장실 들락 거리더니 신생아처럼 분수토를 했다. 나와 장남이 너무 놀라서 괜찮냐고 화장실 문 앞에서 초조하게 불렀다. 여러 차례 저녁 먹은 모든 걸 게워낸 후 남편은 그제야 속이 편하다며 쿨쿨 잠이 들었다.
술주정뱅이 남편 뒷수발에 말 안 듣는 아들시끼까지 두 명이 나를 괴롭힌다. 그림책 '돼지책'을 보면 이러다가 바카라보라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면서 집에 남은 돼지남편과 돼지새끼들이 알아서 밥 해 먹고살면서 엉망징창 되던데. 그러고 싶나? 부글부글 하지만 남편이 아프다니 원망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바카라보라;속 좀 편해? 병원 가서 엑스레이라도 찍자.바카라보라;
바카라보라;병원 안 가도 돼. 어제는 윗배에서 뭐가 막힌 것처럼 안 팠는데 이제 아랫배만 조금 쑤셔.바카라보라;
술병 나서 아픈 남편 전복죽해서 먹이고 유산균 2배로 먹이고 장 편안해지는 약 먹였더니 잠이 쏟아진다며 쿨쿨 잔다. 시골 출신인 남편은 집이 학교와 멀어서 고등학교 때까지 매일 자전거로 1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통학했다고 한다. 체력하나는 최고였는데 늙었는지 자꾸 비실 댄다. 항상 아픈 건 내 몫이었는데 집안의 기둥이 아프다니까 걱정이 한아름이다. 왜 인간은 꼭 위기의 순간에 깨달을까?
바카라보라;엄마 아빠 병원 안 가도 돼?바카라보라;
아이가 걱정이 되었는지 묻는다. 평소에는 마냥 어리광 부리면서 이런 순간에는 가족 걱정도 하고 심각해지는 게 진짜 우리 집 장남 같기도 하다.
바카라보라;너 엄마 알지? 엄마가 너나 아빠가 아프게 그냥 두지 않지. 엄마가 많이 아파봐서 대처가 빠삭하잖아. 걱정 마. 아빠 다 나으셨대.바카라보라;
아빠가 온몸으로 몸빵 해서 게임 무한모드 한 것은 그냥 없었던 것처럼 날아갔다. 우리 집 장남 운빨 장난 아니네. 로또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