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풍군 박적골, 박완서 작가의 글에 종종 등장하는 그곳은 원융한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가난과 결핍, 좌초와 눈물 결손 따위도 그 자체로 온전한. 동구 앞 느티나무와 어머니의 골무와 할아버지의 두루마기와 어린 완서의 빨강 댕기는 독자적으로 선연하지만 서로에게 곡진하다. 온자가 재현하는 세계도 그렇다.
사탕과 고무줄과 도깨비와 머리핀과 손수건과 고무신은 반짝반짝 독립적으로 빛나지만 우연히 서로를 비추고, 의도하지 않은 채 세계는 오, 눈부시다. 어른들은 힘을 합쳐 밭을 갈고 아이들은 우당탕탕 우르르르 아이쿠 엄마야 우주를 달음박질한다. 세상의 모오든 생명과 비생명이 연결되고 접속하고 전도되는 찰나, 를 온자는 공들여 재생한다. 사피엔스가 보낸 한시절, 그윽하고 명랑하고 다정한, 빛의 충돌이 빚어내는 환. 온자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새빨간 거짓말
온자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바카라 녹이기들은 꽤 남루한 편이었다.
거기에다모두들하나같이겨울이면노란콧물을달고살았는데왜그렇게콧물들이노란색이었는지지금도잘모르겠다. 못 먹어서그랬다는설이가장와닿기는하다.
바카라 녹이기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모두들 왼쪽 앞가슴 쪽에 반듯하게 접은 아빠의 손수건을 옷핀에 꽂아야만 했다.
거기에다 사발 크기의 동그라미 하나와 1.5미터 거리 앞에 직선 하나만 그으면 그만이었다.
바카라 녹이기 여자애들은 그 선에 발끝을 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동그라미에 실핀을 던져 구멍에 들어가는 건 거저먹고 원 밖에 나가 있는 것은 강력한 엄지손톱을 이용하여 그 안에 밀어 넣어서 따먹는 놀이에 몰두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바카라 녹이기는 가족들이 일하러 나가고 없는 대낮의 시간에 책보따리는 아무데나 던져놓고 일단 왼쪽 가슴팍에 훈장처럼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소중한 실핀을 개인당 다섯 개쯤 빼서 ‘삔 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뜀박질 소리가 나면서 동네 경계 부근에 살고 있던 향순언니가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은 땀에 젖어있었으며 진하디 진한 눈썹은 한층 올라가 있었고 눈의 동공은 평소보다 커 보였다. 그녀는 말을 더듬기까지 하며 두 손을 움직여 자기가 방금 전 보았던 도깨비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바카라 녹이기는 머리핀이고 나발이고 그따위 것들은 개나 줘버리고는 곧 생명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그 언니와 똑같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마을 바깥쪽에 있는 논과 밭으로 뛰어갔다. 그때는 봄이었고 바카라 녹이기의 부지런한 부모님들은 허리도 펴지 않고 일을 하셨으므로 바카라 녹이기가 도깨비를 피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뛴다는 것을 제대로 모르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카라 녹이기가 얼마나 커다란 위험에 처했는지를 알리기 위해 비명 소리를 지르며 어린 아기 허리 폭만큼이나 가느다란 밭길, 논길들을 뛰어다녔다. 아마 어른들은 바카라 녹이기가 이제 막 눈을 뜬 뱀들이 논 옆의 파란색 개불알꽃과 노란색 애기똥풀꽃과 하찮게 피어서 나풀대는 냉이의 하얀 꽃들 사이를 소리 없이 휘리릭 지나다니는 모습에 놀라서 저러는가 하고 피식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카라 녹이기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에 끝도 없이 달리는 한 살 위 언니를 마치 피리 부는 아저씨쯤으로 여기고 무조건 뒤를 따라 소리 지르며 뛰어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바카라 녹이기의 다리를 총알처럼 움직이게 하는 그 도깨비는 보이지 않았다.
바카라 녹이기가 마침내 지쳐서 어느 길바닥에 묽은 흙덩이처럼 떨어져 처박혔을 때 바카라 녹이기들 머리 위에는 이제 막 연둣빛을 살짝 띤 하얀 아카시아꽃들이 아직 다 피지 못하고 입술을 꽉 다문 채 대롱대롱 봄바람에 흔들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