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편해지는데, 그전에 썼던 글의 일부분이 모순에 빠진다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글을 예정된 일자에 맞춰서 쓰기로 한 것은 독자와의 약속 이전에 나와의 약속이자 계약이다.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어떤 동기보다 쓰지 않을 수 없는 이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고 그저 쓰이는 대로 쓰는 것이 이 글쓰기다라고 수 번 써오고 이야기해 왔다.
정말로 쓸 것이 없다면 지금 안 쓰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안 쓰면 될 것을...... 이미 타고 오던 비행기 안에서 2편의 영화를 봤고, 그중에 하나는 쓸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버렸고, 하나는 쓸 것이 있는 상태로 이 피곤한 몸속에서 하나의 영화 리뷰로 빠져나오기를 원하고 있었다.
괜히 이런 바카라사이트;있어빌리티바카라사이트;를 발휘하고 싶진 않고, 그냥 알아듣기 쉬운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바카라사이트;조커 2편바카라사이트;이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스토리로 전편에 제대로 구현된 바카라사이트;조커바카라사이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극 중에 단호하게 처벌한 덕에 흥행이 어려운 작품이 되어버렸다는 정도의 글을 계속 쓰려고 한다.
바카라사이트;마담 웹바카라사이트;을 마음 한구석 바카라사이트;마블 코믹스바카라사이트;로부터 파생된 바카라사이트;MCU바카라사이트;를 아직도 흠모하는 마음에 비행기 안에서 보긴 했다. 새로운 미모의 배우가 그보다 어리지만 또한 풋풋하고 매력적인 틴에이저 3명과 함께 만들어가는 나름 괜찮은 작품이지만 그보다 훨씬 유명해져 버린 바카라사이트;거미바카라사이트;로부터 얻은 파워로 인간 사회를 구하는 바카라사이트;스파이더맨바카라사이트;과 비교했을 때, 이전의 “배트맨”의 망가진 아류처럼 보여서 망작이 된 바카라사이트;모비우스바카라사이트;의 기시감이 떠오를 정도로 처진 아류의 느낌이 강했다.
이 이후의 후속 편을 만들게 되기를 기대하고 나온 배우 간의 앙상블을 제대로 이루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느꼈고, 마치 바카라사이트;닥터 스트레인지바카라사이트;가 바카라사이트;타임 스톤바카라사이트;을 이용해서 시공을 자유자재로 오가듯이, 미래를 미리 다녀와서 현실에서 그 미래에 대응해서 바로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도 결합되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 다른 성공작보다 더 증강되고 잘 편집된 각본과 연출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심심했다.
이 작품에 대해서 감상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이 이상의 내용으로는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싱겁기 그지없었다. 맹탕을 먹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새롭게 참여한 작가의 능력이 떨어진다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바카라사이트;MCU 작품바카라사이트;의 새로운 캐릭터가 먹히지 않을 정도로 이전에 이미 받았을만한 자극은 모두 받아 버린 것인지 싶었다.
그러고 나서 틀게 된 작품이 이제 리뷰를 쓰고자 하는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바카라사이트;이다.
이 작품에 관심이 간 것은 바카라사이트;니체는 왜 눈물을 흘렸는가바카라사이트;란 소설에서 나타났던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와 바카라사이트;데인저러스 메서드바카라사이트;란 영화에서도 나타났던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에 대해서 할말은 있었다. 아주 많은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 그의 책을 읽고 바카라사이트;정신분석학바카라사이트;에 대한 개론 수준의 지식을 익혔던 청소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저서에서 공식/비공식적으로 바카라사이트;무신론바카라사이트;을 표하고 있는, 인류가 자신이 그저 이성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바카라사이트;무의식바카라사이트;의 강력한 영향을 받고 바카라사이트;심리바카라사이트;에 의해서 말과 행동을 취하게 된다는 통찰을 임상실험과 더불어 선사한 바카라사이트;반지성주의바카라사이트;의 거두이기도 하며, 바카라사이트;결정론적바카라사이트;인 입장을 지닌 채로 강력하게 정치적인 태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며 자신의 학문을 당대에는 완벽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던 고전적인 존재로 불리는 학자다.
이 학자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아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각각의 극화에서 나타날 때마다 그는 마치 각각의 다른 성격과 인생을 사는 것 같은 다채로운 측면을 노출했고, 이 작품에서도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
내가 본 영화 속에서는 2번째로 나타난 것이다. 바카라사이트;데인저러스 메서드바카라사이트;에서의 정치적으로 치밀하고 유대인 중심주의이자 완벽주의자로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여준 바카라사이트;비고 모르텐슨바카라사이트;의 “프로이트”와는 다르게 바카라사이트;안토니 홉킨스바카라사이트;가 보여주는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는 바카라사이트;양들의 침묵바카라사이트;의 살인마 바카라사이트;한니발 렉터 교수바카라사이트;를 일부 떠오르게 만드는 냉철함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취약한 내면을 털어놓는다.
바카라사이트;라스트 세션바카라사이트;이라는 제목답게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는 자신의 생의 마지막 시점이자 2차 대전 발발 시점인 1939년에 자신이 불러서 만나게 된 바카라사이트;무신론자바카라사이트;에서 바카라사이트;기독교도바카라사이트;로 개심한 바카라사이트;기독교적 변증법바카라사이트;의 바카라사이트;C.S. 루이스(매튜 구드가 연기)바카라사이트;와의 대화 속에서는 매우 바카라사이트;말랑말랑바카라사이트;하며 원래 바카라사이트;유신론자바카라사이트;로서의 생을 시작했던 자신이 어떻게 바카라사이트;무신론자”가 되었으며, 바카라사이트;유신론바카라사이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논한다.
(출처: The Arts Desk)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명실공히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이며, 그와 더불어 그의 딸인 바카라사이트;아나 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와 그의 동성연인인 바카라사이트;도로시바카라사이트;가 등장하여 당시의 사회상이 엄격히 동성애를 배격한 상황에서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와 바카라사이트;루이스바카라사이트;가 얼마나 바카라사이트;동성애바카라사이트;에 대해서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시대의 바카라사이트;차별을 배격하는 흐름바카라사이트;에 오히려 맞는 사상을 어떻게 그때 갖고 있었는가가 은연중에 짧은 대화 속에서 나타난다.
(출처: Kinor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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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와중에서도 바카라사이트;C.S. 루이스바카라사이트;는 자신의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카라사이트;영적인 전쟁바카라사이트;을 수행하기 위해서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를 만나는 긴 기차 여행길에 오르며,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는 구강암에 걸려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종교적 진실을 바카라사이트;루이스바카라사이트;에게 고백하여 알리고 자신의 딸의 바카라사이트;동성연인바카라사이트;을 인정해야 하는 자신이 계속 지체시켜 왔던 시점에 와닿게 된다.
(출처: Christianity Today)
죽어가는 자는 약해지고 그가 어렸을 적에 경원시하던 것에 대한 그리움에 다시 붙잡히기도 한다. 과연 바카라사이트;프로이트바카라사이트; 역시 길고도 첨예했던 바카라사이트;무신론바카라사이트;의 시간을 접고 죽기 전에 다시 종교에 귀의하려 했던 것일까?라는 의문의 답을 영화는 그저 애매모호하게 남길 뿐이고 바카라사이트;루이스바카라사이트; 역시 이 논의의 과정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고함을 얻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작품에서 바카라사이트;무신론바카라사이트;이 되었든 바카라사이트;유신론바카라사이트;이 되었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잔잔하게 전하는 내용은 그 어느 쪽 진영에 속해있든 간에 그들은 고민하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의해서 세계에 대한 해석의 기준도 달라지는, 인간이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들이라는 깨달음이자 생각이나 사는 방식이 다르다고 증오하고 처단하는 무지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난 세계를 향해 그동안 걸어왔었던 인류가 마치 한걸음도 그런 걸음을 걸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더 무지한 방향으로 다시 휩쓸려 돌아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이 작품이 던지는 교훈이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내적진실이 만든 신념을 함부로 부수지 못하며 그러고자 하는데서 인위적인 왜곡과 조작이 벌어진다. 그 최종적인 내적진실을 발견해 가는 최후의 세션이 내게도 왔을 때 이 작품이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