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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도 마음도 가난한 바카라노하우이 살아남으려면

십만 원짜리 바카라노하우가 가르쳐준 것

바카라노하우를 새로 사야겠다. 작년에 몇 번 걸치던 분홍색 롱바카라노하우가 너무 닳았다. 대충 걸치자면 그런대로 입겠지만 천이 해지고 보풀이 생긴 부분은 못 봐 주겠다. 어쩌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 바카라노하우를 살 때 매장 직원과 이런 얘기를 나눴었다.


이 바카라노하우랑 저 바카라노하우, 보기엔 똑같은데 왜 얘가 훨씬 싸죠?

아 그거. 재질이 달라요. 울 혼용율이 좀 낮죠.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차이가 날까요?

아무래도... 확실히 나요.


아무렴 어때. 15만 2천 6백 원에 바카라노하우랑 니트 한 벌을 사고 좋아했던 기록이 가계부에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좀 더 가난했다. 아주 가난했던 대학 시절엔 동대문에서 7만 9천 원짜리 바카라노하우도 벌벌 떨며 계산했는데 이 정도면 잘살고 있네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건 빨간색 숏바카라노하우였다. 애시당초 울조차 들어있지 않았을 거다. 사회 초년생 때 그 바카라노하우를 입고 모임에 나갔더니, 한 언니가 날씨 너무 추운데 대학 새내기 때 입던 것처럼 얇은 바카라노하우를 입고 왔네 어떡하냐며 걱정해 줬다. 그 바카라노하우는 며칠 있다 버렸다. 비슷한 값을 준 다른 바카라노하우들도 그때 같이 버렸다. 옷장이 비었다.


유일하게 잘 입는 건 작년에 산 30만 원짜리 헤링본 롱바카라노하우. 옷 한 벌에 그렇게 큰 돈을 써본 건 처음이었다. 첫 월급을 받고 난생처음 내 돈으로 월세를 내던 때만큼 떨렸다. 2개월 할부를 부탁하며 이게 어른의 소비인가 했는데, 살까 말까 고민했던 게 무안할 만큼 잘 입고 다닌다. 아무래도 이런 바카라노하우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는데.


어리고가난할땐뭐든싼걸여러개샀다. 특히옷이그랬다. 만원짜리맨투맨이라도맨날바꿔입으면옷살돈이없는바카라노하우처럼보이진않겠지. 그땐참, 없어보이고싶지않다는자격지심이뇌를장악하던시기였다. 더치페이하면될자리에서도괜히내가산다그러고, 다음에네가사라며웃고, 대개다음은없고, 내가웃는게웃는게아니고.


요즘은좀나아졌나싶다가도내속이쓰린걸보니여전한데가있다. 며칠전한친구의생일이라커피랑케이크를묶어파는9천8백원짜리기프티콘을보내며생일축하인사를전했다. 고맙다~~! 길래좋은하루보내라고카톡을마무리했었다. 그친구가어젠가엊그젠가인스타에자기가받은선물들, 기프티콘들을캡쳐해올렸더라. 내가보낸기프티콘은거기에없었다. 기분이썩좋진않았지만뭐그럴수있지.


잠깐, 하나 짚히는 데가 있어 그 친구와의 카톡을 뒤져봤다. 그 친구를 알고 지낸 게 이삼년 쯤 됐나. 내가 생일을 축하한 기록만 두 번 남아 있었다. 그 친구는 내 생일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다음에 네가'는 무슨.


나는지갑도마음도가난한사람인가보다. 밥굶을일없이사는지금도바뀐게없다. 몇년전산바카라노하우, 얼마전보낸기프티콘이아깝다. 가치없는데돈을쓰고마음을쓰면속이쓰리다. 없어도모를9천8백원어치호의였는데도. 참나란사람의쪼잔함에한숨을쉬다마음을굳게먹기로한다. 이왕이런쪼잔한사람으로나고자란거, 이참에제대로쪼잔해져버리겠다.


내년 내 목표를 세웠다. 가치 없는 것에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낭비하지 않기, 차곡차곡 모아 필요한 것에 큰 돈과 큰 마음 쓰기.

무엇이 크고 오래 남을 것인가.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차이가 난다.

아무래도 확실히 난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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