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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봄날은 -Ⅰ

-바카라 <봄날은 간다 촬영지 기행






주위의 풍경은 그다지 변한게없다. 차들이 달리던 방송국 앞쪽경사로가 사람들만 오갈 수 있는 길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 위세 당당했던 관아와 그 터가 복원되어 일터 바로 아래쪽에 널찍한 앞마당이 생긴 셈이다.그러니까 그다지 변한 바카라 없다는 말은 도리어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는속내다.20년 가까운 세월, 고층 건물은 늘지 않았고 조선시대 관아는 부활했다. 고즈넉함은 시간을 거슬러 동네를 휘감았다. 구도심 다운 외관이다. 그러나 예상했듯이 사람들은 빠져나갔다. 줄어드는 인구는 그나마 신시가지의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다 비슷하지 않은가? 지방 중소도시라는 곳들이. 푸념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강릉의 구도심을 나는 사랑바카라.

바카라봄날은 간다 20주년 상영회가 열린 강릉 대도호부 관아 터


2021년 가을, 인적 드문 강릉 대도호부 관아 터에 모처럼 사람들이 몰렸다. 3회째를 맞은강릉국제바카라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이벤트, 바카라 <봄날은 간다 개봉 20주년 특별 상영회 및 토크 콘서트가 열렸기 때문이다. 귤빛 하늘의 스펙트럼이보라색으로 파장을 바꾸는 시간이 꿈만 같다. 행사용 대형 천막 안으로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뒷모습이 고맙다. 왜 내가 그들을 고마워하고 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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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용사들이 뭉쳤다. 허진호 감독, 유지태 배우, 조성우 음악감독, 그리고 영상으로 함께 한 이영애 배우까지. 촬영 현장이었던 이곳에서의 소회는 각별하다는 바카라 제작진과 지난 20년 동안 이 작품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지는 관객들은 같은 구름을 타고 밤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기쁜 건 이 바카라가 강원도의 바카라가 된 것. 그래서 바카라 속 장면을 빌미로 강원의 속살을 소개할 수 있다는 것. 혹은 강원의 속살 안내를 빙자해 이 바카라를 들이밀고 싶은 것.

바카라제의 밤에서 안타까운 것은 팬데믹이라는 상황이었다. 코로나의 손아귀가 전 세계를 움켜쥔 때여서 출연진도 관객들도 마스크 속에 표정을 숨길 수밖에.나름 인생바카라 개봉 20주년 소식에 달려왔을 덕후들이겠는데 감동의 함박웃음을 공유할 수 없었다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었던가. 결계를 풀고 추억을 맘껏 나눠먹을 수 있는 완벽한 보건안전의 어느 날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기를.


20주년도 한참 지나 다시 봄날을 기다리는 어느 날, 스크린 속 장면에현실의 풍경을 덧대어 비교해보려 한다. 먹지를 대고 그리운 얼굴선을 따라 달뜬 윤곽을 채워 넣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바카라 속 강원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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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토록 앳된 옆모습이라니. 유지태 씨는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가 되었다. 기괴한 각도로 졸고 있는 이영애 씨는 '은수'다. 강릉 터미널인 척하는 첫 만남의 공간은 사실 정선의 버스터미널이다. 바카라 촬영을 한 2000년에도 강릉터미널은 비교적 크고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로케이션 매니저는 아담하면서 적당히 바랜 버스터미널이 필요했을 것이다. 목재 의자의 질감과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매표창구의 서늘함을 보라. 장소 잘 찾으셨다.

바카라는 시작부터 강원도다. 약속시간에 늦은 상우를 기다리며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안 오면 졸면 된다. 자면서 기다리지 뭐. 목은 좀 아프겠지만. 첫인사를 나누고 해야 할 말은 "늦었네요." 한 마디면 충분하다. 남녀불문 쿨하다. 적어도 나의 강원도 인연들과는 대체로 비슷하다. '대체로' 그렇다는 거다.

정선 버스터미널 대합실
와와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터미널 외부


잘 모르겠다. 매표창구 앞쪽 어딘가 일 것이다. 의자의 재질도 바뀌었지만 놓인 방향도 90도 틀어진 듯하다. 공공장소에 가면 사진을 찍기가 민망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주말 오후 번듯한 정선터미널의 대합실은 지나치게 자유롭다. 강원도 시군의 버스노선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더니 여기도 위기인가. 버스 출발시각을 알리는 모니터 화면이 교차하면서수두룩한 행선지를안내한다. 강릉, 춘천, 안흥, 평창, 원주, 임계... 안 가는 곳이 없을 정도다.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거기다 또 하나. 정선은 버스 완전공영제의 모범 지자체인 것을. 정선 '와와버스'는 실핏줄 같은 군내 75개 노선을 하루 350차례가 넘게 운행하는데 일반요금이 단돈 천 원이다. 군에서 직영하니 안정된 근로여건이 보장된 기사님들은 친절의 대명사가 되었고, 버스는 관광객들의 사랑스러운 이동수단으로 거듭나 이용객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오죽하면 아리랑과 오일장에 이어 와와버스가 정선의 3대 명물이 되었을까. 잘하는 건 배우자. 배워야 한다. 지금의 정선터미널에서라면 바카라가 좀 더 아늑하게잠들었을 것이다.난방이 만족스럽다. 예전처럼 빨간 목도리를 얼굴에 칭칭 둘렀다면 땀이 송골 맺혔을 수도. 아니다. 애초에 목도리를 동여맨 것이추워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바카라의 목도리는 낯선 사람을 낯설지 않은 듯 마중하기 위한 방패였던 것인가.



소리의 향연이 시작된다. 대숲이다. 바카라와 상우의 첫 교감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댓잎의 재잘거림은 잘게 쪼개지는 빛에 실려 제각기의 방향으로 부서진다. 릴테이프의 회전은대숲이라는 공연장의 화음을 담아두기 위한 최적의 원운동이다. 어쩔 수 없는 녹음과정에서의 잡음은 차라리 코러스다. 오직 발설이 허용되는 존재는 흔들리는 댓잎뿐. 강원의 소리를 공유하는 바카라와 상우는 그들 자신이 공명(共鳴)하는 반사체가 되어간다.

연인의 달콤한 목소리는 입술을 떼기 전에 이미아름답다. 때로는 소리를 기다리는 고요의 시간이야말로 감미롭기 그지없는 법이다. 시공간을 빈틈없이 채우듯 휘몰아치는 소리에는 설렘이 없다. 바람에 사각거리는 댓잎은 일시정지를 사이에 두고 지저귀는 것이다. 고요와 속삭임이 반복되는 대숲의 연주는 심상치 않은 마음의 동요를 예고바카라.

삼척의대숲 바카라


산비탈에 조성된 대숲과, 숲의 바로 아래에는 바카라에서 두 사람이 강화순 할머니에게 고봉밥을 대접받았던 집이 보인다. 바카라에서 은수의 질문에 일흔둘이라고 나이를 밝히셨는데 살아계신다면 100세 가까운 연세일 것이다. 그저 집 안에 잘 계실 거라 믿기로 한다. 풍경 속에 변함없이 녹아든 집은 리모델링 작업을 거쳤다. 경치만으로 이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네티즌들의 총명함에 기대는 동시에, 언젠가 '바카라 그 후'에 출연했던 기억을 더듬어 연어처럼 되돌아갔다.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의 한적한 농촌이다. 촬영지 기행글을 쓰고 있지만 정확한 주소는 모르겠고, 정확한 주소를 알아내 밝히는 것도 이곳에 살고 계신 분에게 대단한 민폐를 끼치는 것이리라.

정선버스터미널에서 삼척시 근덕면은 자동차로 2시간 가까이 걸린다. 같은 강원 남부권인데도 부담스러운 거리다. 참 넓다. 바카라는. 지금의 대숲 풍경을 근접해 찍지 않은 이유는 볼품없이 파헤쳐졌기 때문이다. 접근마저 까다롭고 위험하다. 낭만적인 기행을 하다가 무릎이 까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가중요시설인 일터 내부라 이래도 될는지 쫄보처럼 움츠러든다. 하지만 바카라 속 장면이니 이미 공개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나에겐 일상의 공간이지만 어느 방송국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25년 전 어느 계절의 주말들은 상우, 은수와 함께 근무했던 것만 같은 날들이었다.잊히지 않는 바카라의 대사 중 하나.

"여기선 아나운서가 PD일도 하고 그래요."

당시에도 뼈를 때리는 대사였는데 지금은 오죽할까. 그래도 신명 나게 방송해야 바카라. 귀하디 귀한 전파에 목소리를 실어 보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부담이기도 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아닌가.

지금도 여기는 그 모습 그대로랍니다. 촬영 기념 포스터도 붙어있고요. 바카라 제작 당시의 행복과 긴장을 되가져갈 수 있을 테니상우 씨, 은수 씨 한 번쯤 방문해 주시기를.


사찰의 소리를 포착하는 데에 반나절이 걸렸다. 깜빡 잠이 든 바카라와 달리 상우는 계절의 공기가 불현듯 몰고 온 금쪽같은 소리를 예민한 감각으로 잡아끌고 있다. 첫 만남부터 바카라는 유달리 잠이 많다. 지역 방송국의 아나운서 겸PD는 그럴 수 있다. 이해한다.

맹수 같지 않은 바람이다. 대웅전의 풍경(風磬)이 풍경다운 간격으로 울릴 수 있도록 봄날처럼 불어주는 겨울바람이다. 사운드 엔지니어의 능력을 거치지 않아도 소리는 알맞은 부드러움으로 테이프에 내려앉는다. 표표히 내리는 눈의 역할이 크다. 육각을 이루고 있는눈의결정은 뻗치고 있는 각각의 팔 사이 공간이 소리를 흡수한다고 하지 않는가. 놀라운 능력이다. 그래서인가 보다. 예쁘게 눈이 내리는 날엔 사방이 고요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눈 내리는 소리뿐이다.상우와 바카라는 대숲의 사각거림을 들었고, 차가운 공기 속 따스한 눈의 소리를 들었다.

이젠 사랑해도 되겠다.

삼척 신흥사 학소루
가운데 대웅전과 좌우에 놓인 설선당과 심검당, 대웅전 처마에 달린 풍경


굳이 바카라 때문이 아니어도 유장한 고즈넉함에 삿된 생각들을 씻어내기엔 최적의 공간이다. 삼척 신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4교구 월정사의 말사로, 강릉 단오제의 주신인 바로 그 범일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태백산 자락에 있다고 하지만 첩첩산중으로의 고생이 필요치 않다. 비교적 평탄한 포장도로에서 바로 사찰 주차장이 연결된다. 이토록 탁월한 접근성에도 한결같은 소소함은 신흥사만의 매력이다. 학이 내려앉았다는 초입의 학소루를 지나면 정면에 대웅전이 보이고 좌우로 설선당(說禪堂)과 심검당(尋劍堂)이 직각으로 배치된 형상이다. 말씀으로 선을 행하는 설선당은 불제자들의 교육의 공간이고 진리의 검을 찾아 정진하는 심검당은 주지가 머무르는 곳이라고 한다. 설선당은 조선 영조 47년인 1771년 지어졌고 심검당은 현종 15년인 1674년 지어졌는데 두 건물 모두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고 한다. 건물 자체의 가치에 더해, 넓지 않은 대지에 기가 막히게 들어선 부속건물들의 배치가 사랑스럽다. 바카라 속 대숲과도 지근거리다. 대형 사찰의 하중에 부담이 있다면 손 잡아끌어 찾게 만들고 싶은 공간이다. 신흥사에서 대웅전에서 풍경소리를 들어보시면 좋겠다.은수는설선당에서 꿀잠을 잤고, 상우와 은수는 대웅전 앞에 나란히앉아 소리를 거둬들였다.


마침내 사랑이다. 서로를 사랑이라 말해도 아무런 거리낌과 부끄러움이 없을 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바카라 후반부에 다시 등장할 은수의 집이 나타난다. 터미널과 대숲, 사찰에서 공간은 급 전환한다. 아름답다 해도 아직은 남남일 수밖에 없는 사람 하나 사람 하나 개별의 공간에서, 은밀하기 그지없는합일의 둥지로 둘은 그렇게 연인이 되어 벅차게 순간 이동한다. 연인이 되어보지 않겠냐고 용기 있게 던진 쪽은 역시 은수다. 은수답다. 한 수 위인 것이다. <봄날은 간다가 남긴 희대의 첫 번째 명대사가 주저하는 상우를 리드한다.

"라면... 먹을래요?"

지구상에서 이 정도로 끌리는 한 끼가 있을까. 벅찬 사랑을 확인하고 서울로 돌아간 바카라는 열병에 빠진다. 주체 못 하는 보고픔. 다들 이 느낌 아시잖아요.

회식을 하다가 친구의 택시를 타고 바카라의 집이 있는 강릉으로 향한다. 검푸른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바카라와 상우는 서로의 몸을 관통하듯이포옹한다. 저 장면에서만큼은 진짜 연인이구나. 두 사람은. 누구의 직관이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봄날은 간다 촬영 중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이라고 한다. 은수의 아파트 앞 길게 뻗어있는 한산한 도로. 늦은 밤 서울에서 연인을 찾아 떠난 남자라면 도착했을 법한 시간. 그리움 가득 품은 암흑이 바스러져 환희의 여명으로 정체를 바꾸는 순간. 폭발하는 사랑은 이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개별자는 소멸하고 완전체가 되어버렸다. 점이 아닌 선을 끌어안은 서로의 팔은 누구의 팔도 아니다. 촬영을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긴 했을까. 거리엔 두 사람뿐이었고 모두는 스크린 밖의 관조자였을 것이다. 가장 공을 들인 이야기에서 공은 사라졌고 바카라는 잊혔다. 새벽 공기를 채운 건 그저 거기 있던 두 사람, 두 사랑.

바카라의 집이었던 동해시 삼본아파트, 오른쪽에 두 사람이 포옹했던 도로가 보인다


바카라 속 감성의 변곡점마다 등장하는 은수의 집은 사실 강릉이 아니다. 관광지논골담길과 가까운 동해시 삼본아파트. 지금도 바다 쪽으로는 거칠 것이 없어서 고지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동해를 향해 내달리는 접근도로는 경쾌함의 표본이다. 라면의 성지가 된 아파트는 제법 유명세를 치러왔다. 사진을 찍으러 간 날에도 은수의 집을 찾아온 젊은 커플을 볼 수 있었을 정도니까. 바카라 촬영지를 알려주는 블로그 등에서 이미 공개하고 있다는 이유로 과감한 척소개하고 있으나, 폐를 끼칠 수도 있어 조심스러움도 한 가득이다.<봄날은 간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폿이지만 누구든 사진으로 벅참을 지그시 누르시고 돌아가시면 좋겠다. 라면 먹고 잠든 은수를 깨워선 안될 일 아니겠는가.

아무나 중 하나에서 내 삶 속의 누군가로, 설렘이 사랑으로 결실을 맺은 빛으로 가득한 공간. 어떤 반전이 있을지라도 그곳은 낙원이었던 것을.


바카라 촬영지는 정선, 삼척, 강릉, 동해 등 강원 남부를 아우른다. 동선의 효율화를 위해 추천할 만한 코스는 뒷글에서 안내해 드릴 작정이다. 그러나 강요하고픈 것은 당신이 직조하는 여행이다. 굳이 <봄날은 간다 일 필요가 있을까.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어떤 작품이든, 혹은 어떤 바카라도 드리워질 필요 없는 각자의 추억이든 여행은 구슬을 꿰는 과정이면 좋겠다. 만약 은수와 상우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는 여정이 달가우시다면 계속 따라오시면 되겠다. 그들의 심경에 안타까운 내리막이 만들어지는 것을 예감하실 테니, 마음은 다잡고 함께 나아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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