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끊은 지 1년 반을 넘기고 있을 무렵 방학을 맞은 나는 몇 달 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스페인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등산과 트레킹을 좋아하는 나는 2013년부터 주기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데 잘 알려진 800km 여정의 '프랑스길' 말고도 스페인 곳곳에거미줄처럼 촘촘히 퍼져있는 다양한 순례길을 섭렵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덜 알려진 '아라곤 길'과 '산살바도르 길'을 걸으며 아라곤 길과 합쳐지는'프랑스길'도 완주하는 계획으로 길을 나섰는데 사실 총 도보거리 1,100km 쯤의순례길을 걸을 걱정보다는 술 인심 좋은 스페인에서 향긋한 뗌쁘라니요 바카라 도박을 야멸차게 거절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보다도 앞서서 예약해 둔 왕복 항공편이 대한항공 비즈니스 석이라는 것이 더 큰 난관으로 여겨졌다.
잠에 무척 예민하고 시차 적응도 몹시 힘들어하는 편이라 장거리 비행은 어떤 준비를 한다고 해도 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그동안 모아둔 마일리지로 비즈니스석 혹은 프레스티지석이라고도 부르는 넉넉한 크기의 의자와 푸짐한 기내 서비스가 제공되는 자리를 예약해 둔 것이다. 2 터미널을 사용하는 국적기 항공사 체크인 카운터에 넉넉하게 도착했더니 이코노미석과는 다르게 길게 줄을 설 필요 없이 비즈니스 승객은 빠르게체크인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보딩패스와 함께 건네진 비즈니스석 전용 라운지 이용권.
사실 여기부터 눈을 질끈 감아야 하는 상황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늘 이용하던 PP 카드 전용 라운지와 비슷한 분위기의 라운지였는데 내가 굳이 외면코자 한 것은 바카라 도박과 위스키 등 술병들이 늘어선 바 테이블이었다. 마시지는 않을 거지만 무슨 바카라 도박이 있는지만 보자, 하고 슬쩍 눈길을 주었다.
지금 기억은 못하겠지만 그리 인상적인 셀렉션은 아니었던 것 같고 위스키도 저렴한 수준들이었다. 이 정도 허들은 간단하게 넘어갔다. 아침이니 커피와 쿠키를 택했고 한동안 못 볼 한국 신문을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이윽고, 보딩 시간!
하늘색 머플러를 맵시 있게 맨 승무원들이 친절하고 싹싹하게 맞아주었다. 미리 정해둔 자리에 앉아보니 넉넉하고 길게 펼쳐지는 좌석이 마음에 들었다. 순례길 여행이니 짐도 간소해서 정리랄 것도 없이 자리에 앉아 이코노미 석보다 몇 배는 많은 이런저런 버튼과 기능들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방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기습적인 한방! 바카라 도박;웰컴 드링크로 샴페인 준비했습니다.바카라 도박;단정해 보이는 승무원은 미소 띤 얼굴로 거품이 뽀그르르 올라오는 막 따른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흡' 코 앞에 놓인 연한 자줏빛 샴페인에서 향긋한 복숭아 향이 올라왔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진 않았고 바카라 도박은 곧이어 다른 승객에게 이동해서 또 다른 샴페인을 권할 찰나였다.
바카라 도박;샴페인 말고 페리에로 주세요바카라 도박;
나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능청맞게 샴페인을 물리고 샴페인보다 더 맹렬하게 기포를 발산하는 탄산수를 받아 들었다. 첫입거리로 제공된 야릇한 야채와 연어를 꼭꼭 씹으며 바카라 도박이 주고 간 기내식 메뉴를 펼쳤는데 뒷장이 펼쳐지는 바람에 기내에서 제공되는 각종 알콜성 리커류의 메뉴를 먼저 보고 말았다.
탄성이 터져 나올 만큼은 아니었지만 2년 전쯤의 나라면 환장을 했을 다양한 하드 리커와 바카라 도박, 맥주 리스트들이 도열해 있었다. 게다가 이 술 목록에는 가격표가 없었다. 그냥 달라면 달라는 대로 무한정 무료로 제공하는 알코올 분수대였던 것이다.
일전에 재미난 블로거가 마일리지를 모아 일등석을 타고 다니며 기내에서 제공되는값비싸고 맛있는 술들을 마셔봤다는 스토리를 본 기억이 났다. 예전의 나처럼 알코올중독자는 아닌 듯했고 술을 즐기는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재미나고 찰지게 다양한 항공사의 기내서비스 주류평을 해놓았는지 그의 글을 보는 내내 재미가 있었고 따라해보고싶은마음이들기도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적정 고도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카라 도박들은 내 자리로와서 테이블 보를 깔아주고 기내식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스테이크를 주문했고 내가 샴페인이나 와인을 사양한 걸 기억하던 바카라 도박은 내가 와인 리스트를 보고고르는 것이 서툴러서 주문을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제공되는 와인 네 가지 병이 모두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와서 와인을 직접 보고 고를 수 있도록 눈앞에 술폭탄을 보여주었다. 상냥하고 살가운 서비스였으나 단호한 금주를 선언한 내게는 목에 칼을 들이미는 것 같은 무서운 유혹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돼!
나는 역시 미소로 응대하며 '제가 술을 하지 못해서요. 그냥 페리에 한잔 더 주시면 좋겠습니다.'로 받아쳤다.
이번에도 바카라 도박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돌아섰다.
즐겁고 맛있게 기내식을 먹고 여정의 반쯤을 날아왔을 때 대부분 승객들은 의자를 눕혀서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탄 기종은 비즈니스석이 창가에 2열이 배치된 형식이었는데 창가 승객도 통로 승객을 지나칠 필요 없이 아무 때나 통로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이 특색이었다. 몸이 찌뿌둥해서 나는 복도로 나가 화장실 앞 공간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확실히 이코노미로 여행을 할 때 보다 피로도가 덜했고 비행도 덜 지루했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바카라 도박이 갤리에서 쟁반에 담긴 라면을 들고 나타나서 누군가에게 가져다주고 돌아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복도에는 아직도 익숙한 라면 냄새가 코끝을 간지렸다.
다시 한번 바카라 도박의 공세가 시작됐다.
바카라 도박;간식으로 라면과 칵테일 한 잔 하시겠습니까?바카라 도박;
바카라 도박들은 승객들에게 숨 쉴 틈 없이 먹여서 잠들게 해야 한다는 강령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리고 이번에는 힘을 주어서 막아냈다.
바카라 도박;술은 빼고 라면만 주세요.바카라 도박;
이번에는 바카라 도박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바카라 도박;무알콜 칵테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바카라 도박;
바카라 도박;그냥 물 주세요.바카라 도박;
그제야 바카라 도박은 내가 난공불락임을 인정했다. 나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시작되는 고난의순례길을 시작하기전에 든든하게 먹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돼서 모든 기내식을 받아먹었지만 여러 차례 유혹했던 와인과 맥주, 칵테일과 위스키의 공격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비행기가 무사히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항공기에서 내리며 상냥했던 바카라 도박에게 미소로 인사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바카라 도박;아이 윈, 유 루즈!바카라 도박;
그리고 이태리와 프랑스에 이어 전세계 바카라 도박 생산순위 3위의 나라 스페인의 끝없이 펼쳐진 바카라 도박밭 사이로 난 순례길을 45일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