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에 있어 아이들과 바카라보라을 오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독립바카라보라은 대개 나 혼자 다닌 곳들이 대부분인데 일본이라고 다르랴. 반나절 정도 시간을 빼서 나 혼자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으나, 가족 여행을 와서 바카라보라 투어를 하고 싶다는 것은 사실 내 욕심에 가깝다고 생각했기에 나도 더 이상 알아보거나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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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초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책 모양 타일로 가득한 역사 벽면과 마주했다.
설렘과 흥분이 느껴짐과 동시에 이미 시작도 전에 지쳐 보이는 아이들을 보니 걱정과 우려의 감정이 교차했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준아가 이곳 진보초에 함께 왔더라면 요기 있는 초딩 유딩보다 더욱 흥미롭게 바카라보라를 거닐었을 텐데... 중학생인 준아는 비아의 4살 많은 형으로, 오늘 일정에는 함께 하지 못했다. 중간고사를 무사히 마친 기념으로 난생처음 친구들과 요코하마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놀러 갔기 때문이었다. 원래 10월 중순 계획했던 일본 여행을 일주일 늦춘 것도 준아의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고 모든 가족이 마음 편히 만나기 위함이었다.
이 바카라보라를 낱낱이 들여다볼 수는 없을지라도 준아 몫까지 최대한 눈에 많이 담고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은 독립 바카라보라보다는 중고 바카라보라이 훨씬 더 활성화가 되어있다고 한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나 보수동 책방 골목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예상했는데, 이내 이곳 진보초는 한국의 헌책방 거리와는 규모도 특색도 다름을 알게 되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바카라보라과 헌책방 거리가 2km에 걸쳐 180여 개가 넘게 있다고 한다.
마치 각자의 개성으로 똘똘 뭉친 독립바카라보라처럼, 이곳 진보초 거리에는 각각의 개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고바카라보라들이 줄지어있었다.
영화 · 연극 · 희곡만, 역사 서적만, 만화책만, 그림책만, 서양 서적만… 각각의 이 가진 이야기는 다양했다.
그리고 이곳 진보초에서는 고서와 헌책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바카라보라에 중고 책이 들어오면 바카라보라 주인은 먼지떨이로 한 장 한 장 털어내고 멋지게 띠지도 둘러 책에 새로운 생명을 준다고 한다. 그렇게 책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바카라보라 주인을 만나 자신의 가치를 찾고 존재감을 뿜어내는 것이다. 책을 대하는 마음이 진심인 진보초 고서 거리 바카라보라 주인들은 이렇게 멋진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었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헌책방 거리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둘러보아도 모자랄 곳이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아이들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르니 마음에 드는 몇 군데만 들어가 보았다.
한국의 북카페와 비슷한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멋진 바카라보라, 오래된 레코드판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보물찾기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바카라보라, 입구부터 각종 소년·소녀 만화잡지로 가득한 만화책 전문 바카라보라... 어느 바카라보라을 둘러봐도 레어템들의 천국이었다.
비아네는 최대한 내가 많은 곳을 담아갈 수 있도록 일본어 간판 바카라보라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궁금한 바카라보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들어가 보라며 편하게 배려를 해주었는데, 진보초 거리가 끝나갈 무렵 효섭 님께서 얼마 전 일본티비채널에서 본 한 바카라보라을 소개해 주고 싶다며 앞장섰다.
방송의 힘이었을까? 바카라보라 안으로 들어서자,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이곳은 공유형 바카라보라으로, 월에 일정 금액을 내고 책장의 한 칸을 빌려 나만의 미니 바카라보라을 운영하는 독특한 컨셉이었다. 책장마다 주인의 이름과 사진 등이 붙어있고, 본인 칸의 책이 팔리면 수익이 돌아가는 형식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책의 거리 진보초에서 책을 파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나 혼자 돌아보았더라면 평범한 바카라보라으로 보여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구석구석 숨겨진 곳까지 우리를 이끌어준 비아네 부부에게 너무 고마웠다. (이것이 현지 가이드의 힘이란 말인가!)
도쿄 여행 2일 차, 첫 번째 코스부터 감동의 물결이다.
엄마 혼자 감동에 취해 있는 동안, 아이들은 지칠 대로 지쳐갔다.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대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카페를 겸하고 있는 한 그림책 바카라보라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사방이 그림책과 아이들 책으로 가득한 사랑스러운 곳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 손님이 아닌 외국인들과 어른들로 테이블이 가득 차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카레를 먹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그림책 바카라보라 겸 카레 맛집이었다. 아이들 앞에 오렌지 주스와 케이크를 놓아주니 잠시 투덜거림이 멈추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몇 권 골라도 보지만 일본어로 쓰인 그림책을 오래 보지는 못했다. 마침 한국에서도 알려진 그림책 작가 이누이 사에코의 전시가 바카라보라 한쪽에 전시 중이었다. 전시도 보고 방명록에 응원의 글귀도 남겨보았다. (한글로..)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니 더욱 함께하는 이들을 배려해야 하고 모두가 함께 좋아할 만한 곳으로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꿈같은 바카라보라로 나를 인도해 준 비아네에게 너무 감사했고, 열심히 따라와 준 우리 가족에게 고맙고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