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비가 내렸다. 전날 하루종일 내린 비가 밤에는 그치길 바랐는데 아침까지 옅은 빗줄기가 흩어졌다. 오늘은 코끼리 보호구역으로 코끼리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간밤에 내린 비로 냇물이 불어 있어서 코끼리 목욕은 못 시켜주고 오겠지 싶다. 평소보다 일찍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도 거른 채 숙소 1층 현관에서 픽업트럭을 기다린다. 7시 10분 전부터 도착해 기다리는데 조금 늦어진다, 언제까지 오겠다는 연락이 없다. 30분이 지나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니 비가 와서 기사님이 늦으시는 것 같다며 10분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 뿐이다. 하염없이 기다려도 빗줄기는 잦아들지 않고 막다른 골목길인 집 앞으로 차 한 대도 들어오지 않는다. 15분이 지나서 우리 집을 놓치고 그냥 간 게 아닌지 다시 확인하려고 연락을 했는데 그럴리는 없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만 되돌아온다. 픽업차량을 기다린 지 정확히 한 시간 만에 차를 탔다. 부아가 나서 왜 늦는다는 연락을 못 하고 한 시간이나 밖에서 기다리게 하냐고 나도 모르게 기사님께 투덜댔는데 기사님이 영어를 못하신다. 어쨌든 차에 탔고 이제 코끼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불편하고 불쾌한 마음은 잊기로 했다.
지루하게 차를 기다렸던 바카라사이트들은 차를 타자마자 언제 도착하냐고 묻는다. 코끼리가 있는 곳은 시내가 아니라서 차로 30분 정도는 가야지 만날 수 있을 거라 일러주었다. 아침을 굶은 바카라사이트들은 배가 고프다 한다. 가방에 있던 젤리를 줬더니 홀랑 까먹는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자 바카라사이트의 배고픔은 배아픔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멀미를 할 듯 말듯한 딸바카라사이트에게 비닐봉지를 쥐어주고, 비가 와서 속이 더 울렁거릴 수도 있다며 분말형 타이레놀을 한 포 주었다. 30분 정도가 지났는데도 차는 목적지로 추측되는 곳으로 속도를 줄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연신 세차게 나아갈 뿐이다. 큰 바카라사이트는 멀미 때문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또다시 ‘엄마, 언제 도착해’라고 묻는다. ‘글쎄, (엄마도 언제 도착하는지 모르는데…) 30분만 더 가면 도착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버텨봐. 토 할거 같으면 저 비닐봉지에 하고.‘ 바카라사이트는 체념한 듯 눈을 감고 배낭에 머리를 묻을 뿐이다. 언제부턴가 픽업트럭은 평지를 벗어나 산길로 진입을 했다. 마주 오는 차도 거의 없고 뒤따르는 차도 없는 산길을 그릉그릉 힘겹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바카라사이트 둘을 태워서 뒷좌석에 앉았지만, 여러 무리의 서양 젊은이들은 뒷좌석 뒤로 이어진 짐칸에 세로로 마주 보고 타고 있는데 지금쯤 엉덩이가 얼얼할 것 같다. 쿠션감이 있는 뒷좌석에 앉은 나도 연신 덜컹대고 흔들리는 차에서 작은 바카라사이트를 붙잡고 타느라 허리와 엉덩이가 아파오는 참이었는데. 인가가 보이지 않는 산길을 한참 달리고 있는데 이번엔 작은 바카라사이트가 배가 아프단다. 큰 바카라사이트야 원래 멀미를 하는 바카라사이트라 귀 밑에 멀미 패치를 붙이고 와서 그러려니 하는데 작은 바카라사이트가 갑자기 배 아프다니 이 산중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그런 건지 물었다.
“ 준영아, 똥마려?”
“ 아니, 배 아파.“
“ 배가 어떻게 아픈데?“
“ 몰라, 그냥 배 아파.”
바카라사이트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당황한 나는 급히 바카라사이트의 배에 손을 갖다 대고 문질렀다. 아닌 게 아니라 바카라사이트의 배가 딱딱하게 부풀어 있었다. 비상용 부루펜 시럽을 일단 바카라사이트에게 먹이고 계속 배를 문질러 주면서 ‘엄마 손은 약손, 준영이 배는 똥배’라는 주문을 영혼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읊조리기 시작한다. 배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지 바카라사이트는 이제 소리를 지른다.
“ 끄아……엄마, 배 아파.”
“ 준영아, 엄마 안아. 약 먹었으니까 10분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엄마가 계속 문질러줄게.”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지 바카라사이트의 신음소리는 점점 높아가고 아저씨는 앞자리에서 변속기어를 고쳐가며 더 높은 곳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릴 뿐이다. 한 시간 넘게 달려왔는데 지금 우리만 되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당장 아픈데 차를 돌려 또 한 시간 이상 차를 타고 시내로 가야 하는 것도 묘안이 아니다. 중요한 건 바카라사이트 배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제발 맹장만 아니기를 바랐다. 반쯤 실성한 바카라사이트에게 어디가 제일 아프냐고 물어봐도 바카라사이트는 어떤 부위를 특정하진 못하고 배 전체가 다 아프단다. 계속 바카라사이트의 배를 문질러 줘 가며, 바카라사이트를 끌어안고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라고 말해주는데도 사실 내가 괜찮지 않았고 바카라사이트의 배 역시 괜찮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카라사이트는 소리 지르다 울다가 급기야 ’나 살려‘ 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내 품에서 축 늘어졌다.
‘나 죽네’ 가 아니라 ‘나 살려’ 란 바카라사이트의 말 앞에서 어찌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바카라사이트를 구해내지 못하는 내 스스로가 너무도 하찮게 느껴졌고 그 와중에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태국 치앙마이 산길, 한인 사건사고 뉴스의 헤드라인이 떠오르며 그 뒤로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이 줄줄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이 첩첩산중에서 바카라사이트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면 나는 무슨 낯으로 살아가지… 더럭 겁이 났다가 너무도 공포스러워 이내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저 바카라사이트의 통증이, 신음이 잦아들기만을 바라며 손바닥이 닳도록 바카라사이트의 배를 문질러주는 수밖에 없었다. 부루펜 시럽을 먹은 지 20여분이 지났다. ‘나 살려’ 라는 외침 이후 바카라사이트는 진통제의 효과 때문인지 설핏 잠이 들어 내 품에 안겨있다. 눈가에는 말라비틀어진 눈물 자국만이 극한 통증의 흔적을 대신하는 듯했다. 트럭은 마지막 안간힘을 써가며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크릉거리며 달리다 어느 숲길에 들어서고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내 품에 꼭 안긴 바카라사이트의 손끝 발끝이 힘없이 출렁댄다. 적갈색의 질퍽한 흙길 주변으로 열대 원시림의 짙푸른 잎들이 소살거린다. 탈탈탈 시동을 멈춘 트럭 창문 밖으로 거대한 점토 코끼리 모형이 보인다. 아니, 움직인다. 모형이 아니라 코끼리다. 동물원에 있는 기운 없고 늘어진 코끼리만 보다가 나도 모르게 건강하고 평화롭게 자연에 노니는 코끼리를 보니 긴가민가 하다가, ’어, 코끼리다 ‘라고 조용히 말하는데 반쯤 까무러져있던 작은 바카라사이트가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창밖을 바라본다. 배낭에 머리를 묻고 고꾸라져있던 큰 바카라사이트도 벌떡 일어난다. 눈앞에 커다란 코끼리가 한가로이 바나나 잎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자 방금 전까지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던 바카라사이트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차 문을 열고 먼저 나선다.
비 그친 숲에는 골고루 분사된 안갯속에 그 푸르름의 채도가 더 짙어 보였고, 때마침 마중 나온 동네 개들이 우리 바카라사이트들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고생했다고 핥아 준다. 놀랍게도 멀미와 두통, 복통에 시달렸던 바카라사이트들은 눈앞의 푸르른 광경에 불과 십 분 전의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 동네 개들과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 나간다. 무해한 자연 속에서, 코끼리뿐 아니라 우리 바카라사이트들도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험한 산길을 달리고 달려 우리는 코끼리 아니 인간 보호 구역에 당도한 것이었다. 배고픔과 배아픔도 말끔히 잊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온순해 보이는 코끼리들에게 바나나를 먹여주기 시작했다. 많이 먹고 계속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무탈한 녀석들에게 말이다.